9월4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9월4일이 태권도의 날인 이유는
1994년 9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태권도의 날을 맞이하여 태권도에 대한 역사를 전체적으로 정리해보았다.
태권도의 전체적인 역사를 알아보려면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하여도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기 때문에
태권도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사상식의 관점으로 가볍게 보아도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오랫동안 준비한 내용이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1.배경
(1) 광복이후의 상황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한반도가 해방되자 그때까지 일본에서 유학 중에 가라테를 습득했던 사람들이 한국 땅에서 가라테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군 창설부대의 일원이자 가라테 수련자인 최홍희 육군소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단에서 자신이 연구 개발하는 가라테(창헌류)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가라데 경기장. 사진은 청도관 관장 이원국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된 이듬해 7월경, 당시의 무도계에는 각 무도가 조선에 흩어져 있는 도장을 통괄하는 협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대한체육협회에 한시라도 빨리 가입하여 무도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고 보급·장려를 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서울의 전상섭, 이원국, 윤병인과 개성의 노병직 등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는 가라테 도장 등을 총괄하여 통합하는 협회를 결성하려고 2차, 3차와 모임을 가졌으나 실패하였다. 공수·당수·권법·수박도 등 통일이 잘 되지 않아 하나로 묶이지 못한 원인으로서는 유력 도장주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과 그에 따른 명칭 문제 때문이었다.
2. 6.25전쟁
(2) 1950년 6월25일 ~
6.25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가라테 인사들이 협회 설립에 합의하여 대한공수도협회 창설하였다.
주요 인물로서는 노병직, 황기, 윤쾌병, 손덕성, 이남석, 이종우, 현종명, 조녕주, 김인화 등이 참여하였다.
초대 회장:조영주(재일본거류민단 단장).
그러나 대한공수도협회 창설 후 한달도 안돼 무덕관 관장 황기가 중앙심사위원 자격을 얻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퇴하였고 이어 한 달 뒤 청도관 관장인 손덕성도 같은 이유로 탈퇴했다.
결국 통합은 이뤄지지 못했다.
(3) 1953년 ~
6.25전쟁 중 무덕관 관장이었던 황기가 독자적으로 대한당수도협회를 조직해 대한체육회 가입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대한공수도협회는 대한당수도협회의 대한체육회 가입을 막기 위해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내는 등 갖은 방지책을 강구하여 결국 마침내 대한당수도협회의 대한체육회 가입을 막았다.
이 방지활동의 주축이 된 것은 윤쾌병, 노병직 등이었다.
대한공수도협회의 회장에는 재무장관을 거친 이중재가 취임했다.
부회장에 국회의원 민관식, 이사장에 노병직, 사무국장에 이종우가 선임됐다.
참고로 회장을 추천한 사람은 민관식이었다.
6.25전쟁 중 무덕관 관장 황기가 독자적으로 대한탕수도협회를 조직해 대한체육회 가입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대한공수도협회는 가입을 막기 위해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내는 등 갖은 방지책을 다 썼다.그리고 마침내 대한당수도협회의 대한체육회 가입을 막았다.
이 방지활동의 주축이 된 것은 윤쾌병, 노병직 등이었다.
대한공수도협회의 회장에는 재무장관을 거친 이중재가 취임했다.
부회장에 국회의원 민관식, 이사장에 노병직, 사무국장에 이종우가 선임됐다.
참고로 회장을 추천한 사람은 민관식이었다.
6.25전쟁 중 무덕관 관장 황기가 독자적으로 대한탕수도협회를 조직해 대한체육회 가입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대한공수도협회는 가입을 막기 위해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내는 등 갖은 방지책을 다 썼다.그리고 마침내 대한당수도협회의 대한체육회 가입을 막았다.
이 방지활동의 주축이 된 것은 윤쾌병, 노병직 등이었다.
대한공수도협회의 회장에는 재무장관을 거친 이중재가 취임했다.
부회장에 국회의원 민관식, 이사장에 노병직, 사무국장에 이종우가 선임됐다.
참고로 회장을 추천한 사람은 민관식이었다.
(4) 1954년 ~ 1955년
최홍희 육군 소장과 부관 남태희를 포함한 제29사단 보병부대가 이승만 대통령의 열병을 받아 대통령 앞에서 가라테연무를 하게 되었다.
연무의 성공을 지켜본 뒤 가라데를 모르는 대통령은 택견으로 착각한 채 극찬했고, 이 무도를 전군에 보급해야 한다고 여러 장교에게 말했다.
최홍희 육군 소장은 반일 입장을 취하는 대통령을 향해 일본의 무도인 가라테라고 할 수 없었고, 자신이 창시한 무도임을 전하면서 한국의 전통무술인 '택견'에서 이름을 착안하여 태권도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1일 최홍희 육군소장이 명칭제정위원회를 소집하여 태권도의 명칭이 대통령령에 의해 공식 인정되었다.
명칭제정위원회에는 국회부의장 조경구, 연합참모의장 이형근 대장, 청두관장 손덕성 등 참석했다.
또 최홍희 육군 소장은 오도관을 창설하여, 관장에 취임했다. 또 청도관의 명예관장으로 추천돼 청도관을 직접 지휘하였다.
(5) 1956년
최홍희 육군 소장이 전국 학생 태권도 연맹을 조직하는 군, 일반 학생의 조직을 정리하였다.
(6) 1957년
최홍희 육군소장이 대전에 최대 규모의 태권도센터를 건립하였다.
(7) 1958년
최홍희 육군소장이 예비군감독직을 이용해 전 예비사단에 태권도를 보급했다.
(8) 1959년
최홍희 육군소장이 21명의 사범으로 구성된 국군 태권도 사범단을 인솔하고 베트남과 대만을 방문하였는데 이는 최덕신(당시 베트남 주재 대사)의 외교 수완에 기인했다.
6월 15일 청도관 관장 손덕성이 6.25전쟁 중 일본으로 밀항한 비국민 및 청도관 분열모략 책동 계획자인 초대 관장 이원국과 접촉해 지령서를 받았다는 등의 이유로 최홍희 육군 소장의 명예관장직을 취소한하였다.
그러나 이 행위는 최홍희 육군소장을 상대로 통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
사실은 손덕성이 민간인이라는 이유로 순방단 멤버에 끼지 못한 것이 이유로 여겨지고 있다.
같은 해 9월 최홍희 육군 소장은 국군 주축인 태권도회와 청도관을 주축으로 하는 대한당수도협회 등을 통합해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했다.통합 선언을 어필했다.
초대 회장 최홍희, 부회장 윤쾌병, 노병직, 이사장 황기가 선임됐다.
그러나, 국내의 정세 불안정(학생 봉기)에 수반해 공식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9) 1960년
'4.19 학생봉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국내 혼란 속에 과거 대한당수협회 공인화를 저지당했던 황기가 단체 명칭을 대한수박도회로 고쳤다.
황기는 정계 유력 인사를 통해 대한민국 문교부 체육회에 사단법인 대한수박도회 등록을 완료했다.
중간에 찔린 대한태권도협회는 이를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문교부에 진정서를 통해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대한태권도협회에 "현재의 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를 방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같은 종목에서 두 단체는 인정할 수 없으므로 통합회의를 가진 뒤 단독단체로 결판난 뒤 다시 서류를 제출해 달라고 대응했다.
마찬가지로 최홍희 육군 소장은 미국 텍사스주의 미사일학교를 다니면서 태권도를 소개하였다.
미국 샌안토니오에서 학우들에게 가라테 명칭을 이용해 가르치던 제자 이준구(미 통칭명 존 리)를 만나 이름을 태권도로 바꾼다.
최홍희 장군을 공항에서 환대하는 이준구(존 리:Jhoon Rhee)
같은 해(1960) 최홍희 육군소장이 각 연대에 도장을 1개 이상 건설했다.
3.최홍희 장군의 약력(1945~1960년)
1943년 10월 20일
일본육군에 강제징수 당하여 서울에서 기초훈련을 받은 뒤 평양사단 42부대로 보내진다.
그러나 학도병 사건에 참가해 체포되어. 반역죄로 일본의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당초에 받은 형은 7년형이었지만 뒤집혀
사형 판결(사형 집행 예정일 8월 18일)을 받는다.
1945년 8월 15일
사형집행 사흘 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해방되었다. 평양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서울에서 학병단 조직하였다
1946년
1월 15일
육군 소위로 임관
3월 전남 광주 제4연대 중대장 취임
4월 중위로 승진하였다. 충청남도 대전에서 제2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
대위를 거쳐 소령으로 승진하였고 육군본부 전속정보 참모역을 맡았다.
1949년
대령으로 승진하였고 미국사관학교 고등군사반에 입학하였다.
1950년
미국 사관 학교 졸업한국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귀국전방지구의 정보 책임역육군사관훈련학교 창설, 스스로 부교장 된다
1951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1953년
보병 29사단 제주도에 창설
1954년
군사 '정보일반론' 집필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55년
충청남도 대전에서 제3군관구 창설 및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
제6군관구 사령관, 육군 정보 참모부장, 전투 기지 사령관, 논산 제2 훈련소장을 역임하였다.
4. 5.16군사쿠데타 ~ 1965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탄생했다.
그 해 9월 대한태권도협회를 대한태수도협회로 개칭하였다.
새 정부 수립 후 태권도, 당수도, 가라테 그리고 일반 무도의 통합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포고령 제6호를 발령, 사회단체 재등록을 명함에 따라 문교부는 1961년 7월 12일자로 공문을 보내 대한수박도회, 대한태권도회, 가라테도송무관, 강덕원무도회, 한무관 중앙공수도장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통합회의를 수차례 촉구하였으나 또다시 명칭의 문제로 인하여 이도회, 이왕숙원무도회, 한무도회, 한무관, 중앙공수도회 대표들을 소집하여 통합회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각관대표들은 논의를 거듭하게 되어 1961년9월14일 겨우 통합회의를 갖게 되었다.
당시 대표 참석자는 지도관 대표 윤쾌병, 청도관 대표 엄운규, 장무관 대표 이남석, 무덕관 대표 황기, 송무관 대표 노병직, 오도관 대표 남태휘 강덕원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이날 역시 명칭 문제로 난관에 부딪혔으나 결국 이남석, 엄운규, 이종우 등이 최홍희 육군 소장에게 타협안(태권도 손과 가라테 손 한 글자씩을 도입한 명칭)을 제출함으로써 대한테수도협회를 매듭짓게 됐다.
그리하여 마침내 9월 14일 통합 창립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업무 추진을 7인 위원회에 위탁하였다.
9월 19일에는 이사회를 조직해 임원들을 구성, 대한테수도협회가 공식 출범하게 됐다.
회장은 공석(최홍희 육군 소장은 명칭을 승인하지 않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이었고,
부회장에는 엄운규, 이종우가 선임됐다.
같은 해 최홍희 육군 소장은 6군단장이 되어 국군 및 미 7사단에 태권도 명칭을 사용해 지도했다.
이 해에 거의 전국군과 전 경찰의 태권도 의무화가 성공했다.
※ 5.16 군사 쿠데타
1961년 5월 16일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한국 대통령의 당시 소장(제2야전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와 장도영 등이 군사혁명위원회 이름으로 일으킨 군사쿠데타.
1961년 5월 16일 발생했기 때문에 516 군사쿠데타로 일반적으로 말한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정권을 탈취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으며, 치안 향상과 경제 개선 등을 명목으로 한국민의 사상·언론을 탄압했다.
6월 10일에는 비밀첩보기관인 한국중앙정보부(KCIA)가 발족되었다.이러한 박정희의 정치는 향후 한국 정치사의 오랜 군사정권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태권도 타임스 113호(2000년 1월 발행) 최홍희 총재 인터뷰에서 발췌
김박사(미국거주사학박사) :
1961년 5월 16일 귀하가 참여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장악됐고,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에 임명되었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요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최 총재 :
저는 한국군을 창설한 110명 중 한 명이었어요. 박 장군은 제 후배이고 제게 말을 걸 때면 늘 존댓말을 썼지요.
제가 쿠데타에 참여한 이유는 제 부하 중 한 명이 육군참모장인 장도영 장군이 이 움직임을 지휘하고 있다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저는 많은 사람들을 쿠데타로 끌어들이기 위해 박 장군이 장 장군의 이름을 이용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 박 장군은 장수들을 반개혁파로 고발하고 미국으로 추방했습니다
당초 박 장군은 쿠데타가 완료되면 자신은 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한국 국민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박 장군도 그의 부하들도 대통령 자리를 빼앗는 데만 전념했어요.
저는 박 장군께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 한시라도 빨리 군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면 국민들은 장차 그대를 존경할 것이다, 라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를 퇴역시키고 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김 박사: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한국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적 활동에 휘말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난들에 대해 뭔가 코멘트 해 주시겠습니까?
최 총재:
사람들은 반정부와 반독재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독재자였던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인간들과 싸웠습니다.저는 박정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난 박정희가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난 그가 합법적인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아요.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혁명군과 싸웠습니다. 해방 후 그는 한국 육군에 들어와 한국 정부에 반란을 기도했습니다. 그의 군법 회의 내내 저는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 중 한 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의 쿠데타에 참여한 것은 군대의 행동이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 장군의 지휘로 이뤄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장 장군의 이름을 이용했을 뿐 쿠데타에 참여한 여러 장수들을 속였습니다. 장 장군과 저는 군법회의에서 판사를 지냈습니다. 저를 포함한 여러 장군들이 대통령에 입후보하는 것을 반대하자 박정희는 우리 장군을 군에서 퇴역시키고 장 장군을 미국으로 망명시켰습니다.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는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하여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KCIA를 사용하면서 그는 한국 국민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치적 환경이 저를 캐나다로 망명시켰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세계에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저는 한국군에게 독재자 박정희를 타도하고, 한국에 민주주의를 회복하라고 강하게 설득했습니다.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박정희는 그가 믿고 있던 KCIA의 부장 김재규 장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죽음은 전제주의적 정부의 종말이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장군, 노태우 장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1990년 초까지 군사정권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독재정권과 계속 싸웠습니다.한국 국민과 싸운 것이 아닙니다.
1962년
대한테수도협회는 6월 20일 대한체육회에 가입했고 10월 5일 사무실도 그곳으로 이전했다.
같은 해 8월 무덕관 관장 황기가 지도관 관장 윤계병(윤쾌병)을 동반하고 탈퇴하였다.
10월24일 테수도가 제43회 전국체전(대구 시범경기)으로 채택되었다.
11/11 전국 최초 공천승단심사가 국민회의당에서 실시된다.
12/15 회장은 최홍희 육군 소장 추천자 채명신, 부회장에 엄운규(청도관 관장), 전무이사에 김승배가 임명되었다.
최홍희 육군 소장은 군직에서 물러나 말레이시아 초대 한국대사에 임명된다.
정부는 오도관 남태희를 단장으로 하는 첫 베트남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했다.
남태희 : 해방 후 청도관 이원국에게 사사,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과 인연을 맺는다.1953년 제주도 보병 제29부대에 있던 최홍희 육군소장을 만나 이후 최홍희 장군의 한쪽 팔이 된다.)
※ 첫 공인승단심사(1962, 11, 11 대한태수도협회)의 내용:현(형), 대련(대련), 논문(3단 이상)의 3종목이었다.대련은 방어구를 착용한 채 1R이 3분 만에 이뤄지는 경기 형식으로 진행됐다.
또, 형은 초단 수심자로 헤이안 5단, 철기 초단, 내보진 초단, 지원, 화랑, 등이 행해졌다.그리고, 지정형은 다음과 같았다.
2단 지정형 → 발색대, 철기2단, 내보진2단, 기마2단, 충무
삼단지정형→십수,발색,연비,단권,사기패,계백,을지
4단지정형→ 철기삼단, 내보진삼단, 기마삼단, 자은, 진수, 암학, 진동, 장권, 삼일
5단 지정형 → 공상공, 관광, 54보, 13, 반달, 팔기권
(화랑, 충무, 계백, 을지, 삼일 외에는 모두 가라데 틀 그 자체였다)
1963년
2월 23일 대한테수도협회가 대한체육협회 정기총회에서 가입 승인을 받는다.
6월 24일 대한테수도협회는 임원을 교체, 회장에 채명신(최홍희 추천), 부회장에 현종명, 전무이사에 박철휘가 선임됐다.
제44회 전국체전에서 태권도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됐다.
최홍희 대사가 말레이시아 총리의 요청으로 태권도 시범을 성사시킨다. 이를 계기로 말레이시아태권도협회 설립이 가능해졌다.
유엔 주재 한국대사 이수영에게 요청하여, 이후에는 유엔 청사에서 태권도 시범 성공하였다.
1964년
시대 배경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1973년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1964년 첫 해군부대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10월 육전부대인 맹호사단 1만수천을 파병해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1973년 3월 23일 완전 철수하기까지 최대 약 5만 명, 연인원 35만 명 이상의 병력을 베트남에 투입하였다.
한국군은 북베트남 병사등을 약 4만명(공식 기록) 살상 했지만, 한국군의 희생자도 전사 약 5천, 부상 약 2만에 이르렀다.호주와 태국도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파병을 했지만,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는 한국이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한미협정으로 파병 규모에 따른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과, 북한과 중국 등의 군사적 위협을 가까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세력의 신장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 군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반전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
한국군은 국내 최정예 부대를 투입해 6.25전쟁의 경험을 살려 강한 전투 양상을 보였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 병사들에게 그 대가로 영주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한국 국내의 정치적 혼란도 있어, 젊은층의 한국인의 미국 이주(특히 캘리포니아주로의 이주)가 급증했다고 한다.
4월 3일 대한태수도협회 임원/회장 박종태, 부회장 백문, 전무이사 엄운규가 임명되었다.
같은 해 최홍희 대사가 직접 완성한 태권도의 틀을 베트남 백충기 단장에게 가르쳐 당수도와의 차이를 명확히 했다.
또 싱가포르태권도협회 설립하였다.
최홍희 대사는 말년에 귀국한 뒤 대한테수도협회 회장직을 인수테수도계 정화작업에 들어갔다. 그 해 9월에 열린 제45회 대회부터 태권도가 전국체전에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65년
1월 15일 대한테수도협회에 회장 최홍희, 부회장 이종우 하갑천 전무이사 엄운규(청도관장)되었다.
최홍희씨의 영문 태권도 교본 발간과 함께 최홍희 대사는 귀국 후 3월 18일 통합 선언식 개최 대한태권도협회 주장하였다.
무덕관 관장 황기는 통합 선언을 무효라고 주장(무덕관은 이를 계기로 내홍 소동이 일어나 김용택과 홍정수 등이 주축이 돼 황기를 제명한 뒤 통합 협조)하였고 황기는 이후 독자적으로 대한수박도회를 활동시킨다.
8월 5일에야 대한태권도협회는 다시 대한태권도협회 명칭으로 바뀐다(회장 최홍희).
또한 예비역인 2성 장군(장군으로서의 권위 효력을 보유)이었던 최홍희 장군은 한국정부로부터 승인받은 국가태권도 친선사절단을 인솔하여 서독, 이탈리아, 이집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순회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각국에 협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국가태권도친선사절단
1966년
1월 최홍희 장군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이사들의 불신임으로 퇴진하였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제5대 회장에 송무관 관장 노병직 취임하였고, 부회장 엄운규, 청도관장 배용기 김용택, 전무이사 이남석. 대한태권도협회 10월 28일 제1회 대통령배 쟁탈 단체대항전 개최되었다.
같은 해 최홍희 육군 소장은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ITF)을 창설. 9개국 승인. 최홍희 육군 소장이 총재가 되었고 취임명예회장에 공화당 김종필 의원이 선출됐다.
(서울 조선호텔에서 식전 개최)
1966년 ITF 창설 기념식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대한태권도협회에 제6대 회장에 국회의원 김용채가 취임되었다.
부회장에 엄운규 청도관 관장 이강익 전무이사 이남석.김용채가 취임하면서 국내 태권도 조직은 사실상 이분화됐다.
10월 27일 ITF는 문교부 사회단체 등록( 제27호)을 완료하였고 11월 30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지정형을 공포했다.
최홍희 ITF 총재가 베트남 정부로부터 일등공로훈장을 수여받고 한·베트남 태권도재단을 설립하였다.
최홍희 ITF 총재는 8월 시카고 전미태권도대회에 초청받아 11월26일까지 미국태권도협회를 설립하고 본부를 워싱턴DC에 두기로 합의했다.
일본에서는 하코네에서 오오야마 최배달씨와 회담(일본으로의 태권도 보급에 대하여)하였다.
또, 최홍희 ITF 총재는 대만으로부터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군인 태권도 사범단을 대만 군부에 파견하였다.
△오오야마 최배달씨와 회담
1966년 최홍희 장군은 최배달이 일본인으로 귀화하려는 소식을 친구로부터 듣고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 들렀다.
최홍희 장군은 당시 최영의(오오야마 최배달의 본명) 씨에게
"당신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내 왔지만 가라테의 제일인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기회를 보아 한국인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모든 조직을 태권도로 전환시킨다면 전 조선민족은 당신을 존경할 것이고, 전 세계인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영의 당신은 애국자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부럽기도 하고 또 그렇게 될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최홍희 장군은 말하였다.
최홍희 장군의 말에 흔들린 최영의(최배달)는 최홍희 장군과 의형제를 맺어 동생이 되는 것을 제안했다.
이후 최홍희 장군의 부름에 답해 최배달은 통합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고 도복을 손에 들고 28년 만에 고향땅 한국을 찾았다.
최배달은 최홍희 장군에게 이끌려 서울과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뒤 최홍희 장군이 기획한 태권도 연무회를 관람했다.
이후 두 사람은 최배달의 고향을 방문했고 최배달은 동생 및 친척과 재회했다.
또 최홍희 장군은 또 KBS에서 최배달의 인터뷰도 기획했다.
두 연맹(국제태권도연맹과 국제공수도연맹)의 통합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의 한국 일정이 문제가 됐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와 ITF 간에는 해외 사범 진출 문제와 단증 문제, ITF 총재가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이 된다는 협회 측의 규약 철폐 문제 등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태권도 장악 움직임과 그에 맞서는 최 장군과의 대립문제의 일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의 방한 일정은 대한태권도협회 및 정부 관계자들과의 미팅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박 대통령이 장악한 대한태권도협회와 한국 정부 인사들이 최배달에게 최홍희 장군에 대한 치욕적 발언을 반복한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최배달은 도쿄로 돌아갈 때 김포공항에서 최홍희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 장군, 용서해 주십시오.저같은 순진한 인간은 이렇게 복잡한 환경속에서는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최배달은 이 날을 뒤로한 채 결국 한국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최홍희 장군 망명 후의 KCIA의 압력으로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최홍희 장군의 불화는 이처럼 국제태권도연맹과 국제공수도연맹(극진공수)의 통합을 막았고, 나중에 태권도 조직의 분열을 낳게 되었다.
이 양대 조직의 통합이 달성되었다면 오늘날의 판도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국내에 방송된 최배달은 태권도인으로 소개됐다.
그래서 그가 가라테가 아니라 태권도를 배운 것으로 알고 있는 한국인이 현재도 많다.
참고자료 : 태권도 타임스 113호 기사 / 창헌연구회 자료발췌
1968년
1월 대한태권도협회장에 김용재, 부회장 엄운규가 임명되었다, 서울에서 대한수박도회가 제1회 세계대회 개최하였고.
대한태권도협회는 규정형 팔괘 1장 ~ 8장, 고려 금강 등 17개 품새를 만들었다.
8월 28일 대한태권도협회는 회원단체에서 ITF를 정식 제명하고 산하에 '국제위원회'를 신설했다.
한편, ITF는 11월 5일, 외무부 민간 친선 외교 단체 등록을 종료( 제60호)하였다.
최홍희 ITF 총재는 파리에서 열린 국제군인체육회 심포지엄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태권도를 군인의 체육종목으로 채택시키기 위한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32개국 대표 앞에서 시연을 성공시켰다. (파리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태권도가 프랑스에 소개됨). 그리고 영국태권도협회 설립 후 스페인, 네덜란드, 캐나다, 인도 등을 보급을 위해 방문하였고, 귀국 후 한국정부에서 체육연구상을 수상하였다.
1969년
홍콩에서 제1회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 대회 개최.
1970년
최홍희 ITF총재가 남태희(아시아 태권도 연맹 회장)과 함께 20개국 보급 방문하였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WTF)
1월17일 회장 김운용(대통령경호실 보좌관), 부회장 엄운규, 이남석 장재식, 전무이사에 홍정수가 임명된다. 3월 15일 계간 태권도지 창간호 발간. 3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의 태권도가 국기로 인정받는다.
3월, 말레이시아에서 ITF는 제2회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 대회를 개최(말레이시아 국왕 부부참석)하였다.
정부는 이란 군부의 요청에 따라 최홍희 ITF 총재에게 교관 파견을 요청했으며 최홍희 ITF 총재는 태권도 교관단 2명을 파견했다.
4월 6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되었다.
5월 7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예의규범을 제정 공포되었다.
1972년
대한태권도협회
1월16일, 회장 김운용, 부회장 박보휘, 전무이사 엄운규가 임명 되었고
1월 19일 기술심의회 발족되었다. 1월 25일, 심판 강습회 개최, 4월 4일, 제1회 지도자 교육 개최하였다.
11월 30일, 중앙도장을 준공.
품세인 태극 1장 ~ 8장을 제정하였고. 12월 1일 태권도 교본 품세편 발간하였다.
ITF 최홍희 총재는 태권도 백과사전(영문판) 작성을 위한 자료수집 작업과 국제사범교육을 위해 29개국 순회방문(유럽, 북미, 중미, 중동, 아시아/중에서도 볼리비아, 도미니카, 아이티, 과테말라에서는 각 국가별로 대통령에게 직접 태권도를 소개(중미태권도연맹 출범기반 마련)하였다.
최홍희가 한국 대통령 재선 반대(3선은 헌법위반 주장)를 이유로 캐나다로 망명. ITF 회원국에 의한 만장일치로 본부를 캐나다, 토론토로 이전하였고 12월 27일 박정희 제8대 대통령 취임하여 유신헌법을 공포하였다.
1973년
대한태권도협회는 지난 1월 10일 기존 군내 소도장 정비(43개소→9개소)하였다.
2월 14일 문교부령 제301호에 따라 국민학교 체육과 과정에 태권도 종목 채택되었다.
태권도의 조직 방위에 힘쓴 한국 정부는 2월 6일 중앙도장을 국기원으로 명명했다.
5월 25일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서울).
5월 28일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 WTF/총재 김운용)이 창설되었다.
8월 31일 문교부령 제325호에 따라 중학교 체육교과 과정에 태권도 종목 채택되었다.
12월 5일 전국 중고등학교 태권도연맹 창설되었다.
12월 9일 대한태권도 명의의 단위 인정증을 국기원장 명의로 개칭 발급되었다.
12월 28일 한국대학태권도연맹 창설되었다.
한편 ITF 최홍희 총재는 같은 해 11월과 12월 제3차 ITF 시범팀 국제태권도사절단(최창근 이기하 박종수 박종재 공영일)을 인솔해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순회방문(사상 최대 시범팀 및 10개국 방문 중 5개국 방문 중 이집트 지부 순회방문(사상 최대 시범단 설립)과 이집트 지부 방문(사상 최대 시범행사를 갖는다.
고 최홍희 ITF 총재 담 베트남전~캐나다 망명
태권도 타임스 113호(2000년 1월 발행) 최홍희 총재 인터뷰에서 발췌.
김 박사:
1966년, 당신은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합니다. 이 조직을 설립한 목적과 당시 당신을 도와준 사람을 가르쳐 주세요.
최 총재:
1965년 제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재서독 한국대사이자 제 친구였던 최덕신 장군이 유럽에 태권도 친선사절단을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 6개국에서 사절단 파견이 공식 초대가 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저는 정부에 정확한 여비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사절단 이름은 '국기태권도 친선사절단' 이었습니다.
제가 공식문서에 국기태권도라는 말을 쓴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사절단원은 한차교, 박천수, 권재하 그리고 김창근으로 제가 사절단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독, 이탈리아, 이집트, 터키, 말레이시아 그리고 싱가포르를 다녀왔습니다. "연무회는 대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원정한 나라들에서 태권도 협회가 창설되었습니다"
1966년 3월 22일 9개국 대표자들이 서울에 모였고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설되었습니다. 여당인 공화당 위원장 김종필씨가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저는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통상 산업 장관인 Lee, Han Ra씨가 부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사무국장에 엄운규, 기술위원회 위원장에 이종우가 선출되었습니다.
국제태권도연맹 창설은 국제기구 본부가 한국에 만들어진 것, 그리고 한국인이 총재를 맡는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국제태권도연맹 창설 회원국은 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서독, 미합중국, 터키, 이탈리아 그리고 이집트였습니다." 연맹은 급속도로 커져서 2년 만에 30개국이 가입했어요.
김 박사:
베트남 전쟁 동안 태권도는 어떻게 널리 보급되고 많이 훈련될 수 있었습니까?
최 총재:
베트남은 태권도가 대대적으로 교수된 최초의 외국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고딘 디엠 대통령은 1959년 우리 연무회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지도자들에게 베트남 군대에서 가르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첫 번째 사범단은 남태희 소령의 인솔로 1962년 베트남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태권도를 베트남 군과 시민 그리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과 다른 나라 병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베트남전이 확대되면서 베트남으로 보내는 지도자 수가 늘어났습니다.
1973년까지 647명의 태권도 지도자들이 베트남에 갔습니다
그들의 지도로 병사들은 기술적으로나 새롭게 개발된 툴에서도 능숙해 보였습니다. 한국인 병사들의 태권도 수련 강도는 베트콩(남베트남 해방전선 병사)에 심리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태권도 수련을 통해 한국 병사들은 좋은 건강 상태와 강한 정신력, 그리고 뛰어난 전투 기술을 몸에 익혔습니다.
베트콩 지도자들은 군인들에게 만약 한국 군인과 조우할 경우 싸우지 말고 퇴각하라는 통보를 하더군요. 아이러니컬하게도 태권도는 전쟁으로 인해 비약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태권도를 배운 많은 외국인 병사들은 나중에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지도자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베트남전을 통해서 많은 지도자들은 전 세계에 태권도를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김 박사:
"최 장군, 당신이 대답하기 어려워서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는데, 한국 망명의 배후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최 총재: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되면서 그의 한국 안에서의 힘이 탄탄해졌어요. 한국의 정치적 풍조로 보아, 내가 한국에 있으면서 그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나는 가택연금을 당하거나 감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가 정적에게 무엇을 해왔는지 쭉 지켜봐왔습니다. 이러한 주위 상황으로 인해 저는 태권도의 장려와 ITF의 운영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태권도는 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선거 후 박 대통령은 나를 대신해 대통령경호실 보좌관인 김용채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취임시켰습니다.얼마 후 대한태권도협회는 ITF에 간섭해 왔습니다.
1971년 8월, 저는 ITF 상임위원회를 주재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 말했습니다.
"위원 여러분,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는 한국인이지만 그렇다고 ITF가 한국 정부에 지배하고 관리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ITF는 국제기구로 우리의 결정에는 설령 압력이 있더라도 어떤 나라의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 후 저는 비밀리에 한국을 떠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김 박사:
캐나다로 망명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최 총재:
있었습니다. 우선 캐나다는 서방 국가의 일원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라면 서쪽에도 동쪽에도 그리고 제3국가에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태권도를 보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지리적인 이유입니다. 캐나다는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딱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가기에 편리했습니다.,
세번째이유는 제애제자인 박정수가 이미 캐나다에 제대로 태권도협회를 창설하고 있어서 굉장히 성황한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ITF의 본부를 캐나다로 옮기는 것은 간단했습니다.,
그 후 저는 1976년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캐나다를 기반으로 태권도를 올림픽 경기로 승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박사 :
예비역 2성 장군이 캐나다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정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최 총재: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으로 돌아오도록 저를 설득하기 위해 저명한 국회의원을 저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박 대통령이 나에게 외무대신이나 좋아하는 고국에서의 대사직 등 내각의 지위를 약속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첫 번째 시도에 제가 반박을 하자, 그 다음 박정희 대통령은 저의 친한 친구를 보내서 제 귀국을 설득시키게 했습니다.
그것도 실패로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아들과 딸을 유괴하고,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숨을 보장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대답은 '나는 아들보다 태권도를 택한다' 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저의 성격과 결의를 알고 김운용씨에게 ITF와 싸우기 위해서 세계태권도연맹(WTF)의 창설을 명령했습니다.,
김박사 :
25년간의 망명 생활에서 귀하는 어떤 고초를 겪었습니까?,
최 총재:
귀순한 인간의 생활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재산도 없고 웃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습니다. 근데 저는 한국을 떠난 제 결심을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태권도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민족, 종교, 국적 그리고 사상에 관계없이 태권도를 가르쳐 왔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고, 이 세계에 제 발자취를 남겨 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권도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은 어렵지만 매우 보람있는 일입니다.,
저는 항상 여행을 하고, 세미나를 열고, 연무회를 지휘하고, 대회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KCIA(한국중앙정보부)나 한국 외무부에서 목숨을 내놓고 했습니다.
한국정부정보부원은 공항직원들에게 제가 한국대통령을 죽이려고 하는 테러리스트조직의 지도자로 입국을 금지하라고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세미나 시설을 주지 않기 위해 체육관 주인에게 압력을 가했어요. 그 대안으로 어쩔 수 없이 공원에서 세미나를 열어야만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오래된 제자들을 몇 명 보내서 여러 번 저를 유괴하려고 했습니다. 저를 암살하려는 기도도 있었습니다.
KCIA의 정보부원은 해외에서 가르치는 사범들에게 저와의 관계를 계속한다면 사범들의 부모님을 협박하겠다고 말했어요.
정보부원들은 또 해외 거주자 사범들에게 만약 변함없이 저를 지지한다면 여권을 갱신해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 사범들은 저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한국 정부로부터 제가 받은 압력 때문에 저는 더욱 강해졌고, 제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새로운 태권도 기술 개발에 쏟았습니다.
저는 전 세계에서 같은 체계적 방법으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974년
대한태권도협회는 1월 12일 한국국민학교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다.
5월 15일 WTF 제1회 국제심판강습회 개최하였다.
8월 7일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을 (재)국기원으로 등록하였다.
10월 18일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서울)하였다.
12월 31일 문교부령 제350호에 따라 고등학교 체육교과 과정에 태권도 종목 채택하였다.
ITF태권도는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하였다.
최홍희 ITF 총재는 11월 제4차 ITF 시범팀을 인솔해 도미니카 콜롬비아에서 시연을 가졌으며 12월에는 베네제라 수리남 크라카오에서 현지 사범을 모아 교육지도하였다.
1975
WTF는 8월 28일 제2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서울)하였다.
10월 8일 WTF는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에 가입해 국제적인 스포츠로 승인된다(캐나다 몬트리올).
ITF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태권도 시범을 펼친다.또 최홍희 ITF 총재는 그리스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을 순회 방문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유럽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1976년
WTF는 4월 9일 국제군인체육위원회(CISM)에 태권도를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서울)되었다.
ITF/최홍희 총재는 이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 각국을 순회하며 세미나를 개최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유럽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1977년
9월 최홍희 ITF 총재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국 독재정권 규탄대회에 참석해 태권도를 개인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죄상 폭로하였고. 그리고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호주, 스웨덴, 덴마크를 순회 방문하여, 각국의 협회 설립을 촉구했다.
1978년
5월 최홍희 ITF 총재는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순회 방문한 뒤 제5차 ITF 시범팀을 인솔해 스웨덴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서 시위를 벌인다.
※ 1978년 12월 27일 박정희 제9대 대통령 취임.
1979년
최홍희 ITF 총재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동서유럽을 통일한 통일유럽태권도연맹을 결성한 뒤 스웨덴, 덴마크, 서독 프랑스 그린란드를 방문했다. 동년 11월에 제6차 ITF 데모 팀을 인솔해 아르헨티나를 지도 방문하였다.
※ 1979년 한국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부마 민중 항쟁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KCIA 부장(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된다.전국에 계엄령 선포
11월 24일 서울에서 140명의 민주운동 인사들이 체포돼 고문.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육군 3군사령부, 육군본부, 국방부 습격해 국방장관 구속. 서울의 봄 숙군 쿠데타
1980년
WTF가 국제군인체육위원회(CISM)에 가입했다.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83차 IOC 총회에서 세계태권도연맹과 태권도 종목이 승인되었다.
11월 1일 제1회 CISM태권도대회 개최(서울)되었다.
ITF 최홍희가 북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제7차 ITF 시범팀을 인솔하고 처음으로 태권도를 고향땅으로 소개.(최홍희의 출신지는 함경북도)하여 조선태권도연맹 개설이 가능해졌다.
같은 해 11월 18개국이 참가한 제1회 태권도 동서 통일 유럽 선수권 대회가 영국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제7차 ITF 시범팀 / 평양
※1980년 한국
4월 14일 전두환 장군, 중앙정보부장 겸임.
4월 중순 노동자, 학생의 민주화 요구 데모 고조.
5월 15일 서울에서 5만 군중이 시위
5월 16일 신군부, 계엄령 전국으로 확대 광주 3만 군집 시위
5월 17일 전두환 장군,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국회 강제해산, 대학 봉쇄, 김대중 등 민주인사와 학생 체포(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1981년
WTF는 1월 15일, 국제 스포츠 체육 평의회(ICSPE)에 WTF가 가입하였고. WTF 일본 태권도 연맹 설립되었다.
ITF는 1981년에는 제1회 태권도태평양지역선수권대회가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에서 개최되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남태평양태권도연맹과 호주태권도연맹 결성. 같은 해 최홍희 ITF 총재는 제8차 ITF 시범팀을 이끌고 6월 일본 도쿄를 방문하였고. 8월 아르헨티나 레시탄시아에서 ITF 제3회 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10월 북한을 방문.
11월 오스트리아 윈에서 열린 해외 기독교회 회의에서 남북한 태권도 사범들의 연무회를 선보였다.
※ 1981년 3월 3일 전두환,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제5공화국 출범
1982년
6월 ITF는 캐나다에서 북미태권도연맹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최홍희 ITF 총재는 푸에르토리코, 그린란드, 영국, 서독, 오스트리아, 덴마크,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를 태권도 지도를 위해 방문했다.
1983년
ITF는 일본국제태권도협회 설립하였고 초대 회장에는 정진식이 임명되었다.
1984년
WTF는 OCA 총회에서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부터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최홍희 ITF 총재는 IOC 본부를 공식 방문해 ITF와 WTF 통합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였다.
ITF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제4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1985년
5월 ITF가 본부를 오스트리아 · 빈으로 이전(이를 기회로 공산권에서의 태권도 보급이 용이하게 되었다).
또 최홍희 선생이 창시한 태권도의 완전 완성판 백과사전 완성하였다.
※ 완전 완성판 백과사전은 북한에서 출판되었다.
북한에서는 어떤 출판물이든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나 큰 글씨로 쓰여진 김일성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출판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북한에서 1985년 태권도 백과사전이 출간되었을 때 그 내용에 대해 클레임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체사상에 관한 말이 일절 없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언급도 일절 없는 것이 문제라며, 백과사전 첫머리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모시고 조선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매진하자"는 문구를 넣어달라는 고위관리들의 요청이 있었다.
하지만 최 총재는 단호하게 끝까지 이 게재를 거절해 한때 출판이 중단될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무사히 완전 완성판 백과사전(전 15권)을 세상에 보낼 수 있었다.
참고자료: 최홍희 총재 회고록
1986년
WTF는 7월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제1회 월드컵 태권도대회를 개최되었다.
9/30 ~ 10/3 제10회 아시안 게임에 정식종목으로 참가(서울)하였다.
ITF는 중국에 태권도 보급 시작하였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5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1987년
WTF는 88올림픽에서 시범종목 확정되었다.
ITF는 북한에서 태권도 영화가 상영되었다.
당시 영화 첫머리에서 태권도는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며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의해 발전되어 오늘날 전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다라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이 영화를 본 최 총재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당시 북한 태권도 위원 간부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 영화의 부당성을 강력히 항의하며 책임을 추궁했다.
최 총재는 당국에 북한의 태권도는 1980년 10월 내가 처음 입북하면서 널리 퍼졌다는 것을 세계 태권도 회원들이 모두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한국도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우리나라 고유의 무도라고 선전하고 있는 마당에 북한도 이처럼 태권도를 선전한다면 다시는 이 북쪽 땅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단호하게 바라자 비로소 영화 내용이 수정되게 됐다.
또 북한 노동당의 한 고위관료가 최홍희 총재에게 태권도 정신보다 주체철학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다그친 일이 있었다.
최홍희 총재는 전 인류에 속한 태권도에 주체사상을 더할 수는 없다고 답했지만
물러서지 않는 고위관료는 주체태권도라고 더하면 어떻겠느냐고 강경하게 압박했다.
최 총재는 당신 혼자서 주체태권도를 하라며 대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참고자료: 최홍희 총재 회고록
1988년
WTF는 9월, 제24회 올림픽 대회(서울)에서 공개 종목 개최하였다.
ITF는 헝가리 부타베스트에서 제6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1989년
ITF는 북한 평양에서 제13회 세계학생대회개최,
1990년
ITF가 소비에트 모스크바에 태권도를 보급했다.
ITF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7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 1991년 12월 소련 붕괴
1992년
WTF태권도가 제25회 올림픽 대회(스페인 바르셀로나) 공개적으로 정식 종목이 된다.
ITF태권도가 북한 평양에서 제8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되었다.
1993년
※한국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14대) / 한국에서 건국 후 첫 문민 대통령이 되었다
1994년
※북한 7월 8일 김일성 사망
IOC(파리·IOC 제103차 총회)에 의해 WTF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것으로 승인된다.
제12회 아시아경기대회(히로시마)에서 정식종목으로 참가되었다.
ITF는 말레이시아 쿠알라테렝가누에서 제9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되었다.
1997년
ITF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10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1998년
※한국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취임( 제15대 대통령).
국제체육평의회(ICSPE)에 WTF가 가입.
1999년
WTF는 제13회 아시안 게임(태국 방콕)에 정식 종목으로 참가되었다.
ITF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1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되었다.
2000년
WTF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ITF는일본 도쿄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되었다.
2001년
7월 6일 ITF는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제12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및 제13회 정기총회 개최하였다.
총회에서는 차기 총재를 최홍희 총재의 친생자녀인 최중화 사무총장으로 결정했다.
최홍희 총재는 또 7명의 자문위원 선출하였다.
또, 차기 세계 대회 및 정기 총회의 장소를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결정하였다.
※ 8월 24일 김운용 WTF 총재/IOC 위원과 장웅(북한) IOC 위원이 ITF·WTF 공동경기에 대해 논의.
ITF는 9월 1일 최홍희 총재가 총회를 대신하는 특별집행위원회 개최하였고. ITF 총재는 아래의 문제에 대해 자문위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사무총장 및 연맹참모의 임명
7단 이상과 각국 협회장의 제명처분, 태권도 기술 및 경기규정의 보강 또는 개정
연맹 본부의 이전
사업 및 연맹의 예산 책정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태권도 분규
위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임기만료 후의 위원 선출은 총회에서 하도록 했다.,
ITF는 9월 중순 최중화 사무총장이 캐나다 협회의 클린트 노먼 회장의 승인 없이 총회를 소집하여 부회장 스탠리 5단을 회장으로 선출했다는 점에서 이 행위는 월권행위라고 격분한 많은 사범들이 최홍희 총재에게 최중화 사무총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또, 이탈리아 총회에서의 차기 총재에 관한 결의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하 최홍희 총재의 회고록에서 발췌
9월 중순부터 중화의 비윤리적이고 무분별한 행위는 더욱 심해지고 노골화되었다.,
내가 임명한 티보로 변호사를 통해서,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 나를 괴롭혔다.,
그는 갈라라가 7단에 대해 2년 후에는 최중화가 총재가 되므로 이제 연맹의 지지는 무시하고 최중화 사무총장의 지지만 따르라고 한 점, 캐나다 태권도협회의 운영에 간섭을 시작하고 클린트 노먼 회장의 승인도 없이 총회를 소집해 자신의 심복인 부회장 스탠리 5단을 회장으로 선출한 월권행위 등이 그것이다.
ITF는 10월 25일 토론토 최홍희 총재는 최중화 사무총장의 월권행위에 대한 대책으로 측근자회의를 소집하였다.
2002년
ITF는1월 12일 최홍희 총재는 빈에서 특별총회를 개최하였다. 가맹국의 54개국(가맹 1/3을 웃돈다)의 대표자와 연맹 자문위원 외 집행위원이 참석하였다.
-최중화 사무총장 해임-
이하 최홍희 총재의 회고록에서 발췌
총회 전날 중화(사무총장 최중화)는 사무차장인 톰(토마스 매컬럼)을 폭행하며 소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는 등 처음부터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반면 대의원도 아닌 중화 편에 선 10여명이 각국에서 모여 그 고급 힐튼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자주 드나들며 총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참석 자격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총회 당일 미리 회의실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을 불러 모두 쫓아냈다. 그동안 중화는 사무총장이니까 참석이 가능했다
내가 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모두 기립해서 인사를 하는데 중화만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중화는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 회의는 모두 북한으로부터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이 총회는 불법적인 회의다!내일 내가 따로 회의를 마련할 테니 올 사람이 있으면 와 달라!"고 내분을 조장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누가 그를 따를지, 왜 중화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혼자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지 나에게는 딱해 보일 뿐이었다. 중화의 무분별한 발언과 행위에 참석한 대표자들이 모두 일어섰다. 이들은 ITF 사무총장직의 즉각 해임을 요구했다." 비록 자제지만 총재가 이 문제를 단호히 결심해야 합니다."라며 사방에서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해 왔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의 추방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총회 결과는 냉정했다.
지난 7월 이탈리아 13차 총회(리미니 총회)에서 결정된 차기 총재 인계에 관한 건을 일절 무효로 하고 나를 총재로 계속 추천한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종신직으로서 총재직을 다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규약대로 임기 6년을 말기로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2003년 총회 때 총재직을 사퇴하고 오직 종신 명예총재로서 태권도 통합에 전념하겠다는 나의 근본계획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02년 6월 15일 ITF 최홍희 총재가 위암으로 평양에서 사망.향년 84세.
7월 14일 대한민국 대한수박도회 황기씨(옛 무덕관 관장) 사망.
WTF는 7월 도쿄 요요기에서 2002태권도 월드컵 개최하였다.
같은 달 WTF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제14회 세계군인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ITF는7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제2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 개최하였다.
8월 IOC 위원장이 미국 IOC로부터 시드니 올림픽 승패 조작 의혹에 대한 조사 의뢰를 받는다.
같은 달 부산에서 박명철 조선IOC 위원장과 장웅 IOC 위원, 그리고 김운용 WTF 총재/IOC 위원이 회담하였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북한 태권도 선수의 참전 의사를 확인하고. ITF·WTF 룰의 절충을 시사하였다.
또 국제경기연맹(GAISF) 회장이기도 한 김운용은 장웅이 대표로 있는 국제무도연맹을 연내 산하에 가입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9월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개최하여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선발한 연무단이 평양에서 공연하였다.
같은 달 북한 평양에서 ITF 임시 특별총회가 열려 ITF 신임 총재에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조선체육지도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선출(이후 장웅그룹으로 함)하였다.
의혹설
각국 대표자에게 임시 특별총회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고 최홍희 총재 100일 추모행사'로 소집.사실이라면 규약 위반이 된다.
'임시특별총회'를 강행하여 최 총재의 '유언'을 근거로 새 총재를 선출. 많은 조선말을 할 줄 모르는 대표들을 부족한 영어통역으로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장웅은 입장 시의 박수를 투표의 박수로 받고 결정되었다고 하는 해외 사범은 실제로 존재한다.)
※ '유언'에 입회한 토머스 매커럼 사무총장의 말
"최 총재는 정상적인 의식으로 말을 나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영어 통역을 하는 자의 말이 너무나 외운 대사처럼 명확하고 믿기 어려웠다."
10월 조선태권도연맹에서 선발한 연무단이 서울에서 공연하였다.
11월 7일 ITF(최중화파) 2002년 1월 윈에서 열린 특별총회를 무효화한 최중화파 회원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14차 정기총회 개최. 최중화씨가 총재로 선출(이후 최중화그룹)
2003년
5월 ITF(장웅그룹) 는 평양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제13회 세계선수권 및 제14회 정기총회를 그리스 테살로니키로 변경해 개최하였다.
6월 ITF(반장웅파)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제13회 세계선수권대회 및 제14회 정기총회 개최하였다.
앞서 열린 평양 임시 특별총회가 규약 위반으로 무효라고 규정한 회원국 대표들이 정기총회에서 총재 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새 총재로 캐나다의 트란트류광 사현 8단이 선출된다(이하 트란콴그룹이라 한다).
2004년
1월 김운용 IOC 부위원장/WTF 총재/한국민주당 의원/
공금 횡령 및 불법 외화 반출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
사실상 태권도 통합 협의 결렬
관계자료 : 조선일보 2004년 5월 13일(목)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13일 세계태권도연맹과 국기원 등의 공금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운용(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에 대해 징역 7년에 추징금 7억8800만원가량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피고인은 직위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기고 집과 은행 등에 76억원이량의 현금자산을 확보하는 등 국민을 실망시켰다.
또 스포츠 단체를 사기업화하면서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고 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태권도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정당화하려고 했다.
또 세계 IOC위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부당하게 처벌받고 있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해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6월 WTF는 사퇴한 김운용 전 총재 대신 경희대 총장 조정원이 새 총재로 선출됐다.
같은 달 ITF(장웅그룹) 말레이시아 Representatives에서 특별총회를 개최하였다.
10월 ITF(최중화그룹) 한국 대전시 외곽 컨벤션센터에서 제13회 세계선수권 개최 및 제7회 세계청소년대회 개최하였다.
최중화씨는 한국에 입국하지 않아 대회에 결석하였다.
11월 ITF(트란콴그룹) 제1회 태권도 월드컵을 미국 플로리다 디즈니랜드 내에서 개최하였다.
2005년
6월 ITF(장웅) 12일, 오스트레일리아·퀸즐랜드주 카라운드라시 15회 정기 총회 개최하였다.
7월 ITF(트란콴) 독일·도르트문트에서 제14회 세계 선수권 및 제15회 정기 총회 개최하였다.
10월 재작년 전부터 ITF 본부의 점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트란콴씨가 인솔하는 ITF와 장웅씨가 인솔하는 ITF와의 사이에 전개되고 있었지만 고등재판소에서 결착.
트란콴씨가 인솔하는 ITF측이 법적으로 승인되었다. 반면 장웅 씨 측은 즉각 상고했으나 기각됐다.
11월 트란콴씨가 이끄는 ITF 산하 조직인 유럽태권도연맹(AETF)이 법적으로 등록되어 EU 각국에서 ITF 명칭과 로고의 독점 사용이 인정되었다.
2006년
12월 5일 캐나다 연방법원에서 ITF(트란콴)와 최중화씨 및 그 관련 회사 사이에 싸우고 있던 태권도 상표권 문제로 ITF(트란콴)에 승소 판결.
2007년
6월 캐나다 퀘벡시티에서 제15회 세계선수권 및 제16회 정기총회 개최되었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호주 등 최중화 그룹 주요 사범들이 합류했다. 또 총회에서는 마이크 모닝 스타 사범의 복권이 승인됐다.
ITF태권도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한국 근현대사와 결부시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대강의 근현대사의 흐름과 함께 적어보았습니다.
블로그가 처음이라 필력이 부족하고 시각적으로 읽기 쉽게 하는 작업을 하는 것 등 많이 부족합니다만
댓글에 피드백을 주신다면 적극적으로 배워서 더 발전해 나가고 싶으니 언제든 댓글로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만약 틀린내용이 있다면 확인하고 수정작업을 할테니 댓글로 부탁드리겠습니다.